새 채널 (외주채널) 설립논의에 대한 독립영화 제작자들의 문제의식과 제언 :: 2004/06/12 10:51

새 채널 (외주채널) 설립논의에 대한 독립영화 제작자들의 문제의식과 제언 (1) 2004. 6. 9 외주채널 간담회 발제
발제자 : 김이찬 (독립영화 감독) 한국독립영화협회 다큐멘터리 정책연구팀
1. 무엇을 위해 외주채널을 논의해야하는가? -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미래의 공동체를 생각하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외주채널 관련 논의는 주로 ‘방송영상 산업적 측면’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즉 기존 방송3사의 시장독과점으로 인한 산업적 폐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외주채널의 신설이 적절한가가 주요 쟁점이 되어있는 듯하다. 지상파 독점의 폐해는 특히 산업적 관점에 기반하여 제기되고 있다. ‘ 지상파방송사가 뉴미디어시장까지 잠식하여 방송시장의 활성화를 저해하고 있다는 점’ , ‘ 외주업체와 방송사간의 관계가 불평등하여 외주제작 비율은 늘어났지만 다양성 지수는 떨어졌다. ’ ‘ 그 구조적 불평등으로 인해, 일부 독립제작사들과 방송사 간에 담합과 비리의 관행이 온존되고 불공정거래가 반복되고 있다’ 등이다. 당연히, 위와 같은 문제들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시대적 과제이다. ‘방송사들 간 또 방송사와 독립제작사간 구조화된 불공정 거래관행을 개혁하는 일은, 우리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정치구조의 개혁, 경제개혁, 권력집단의 특권의 폐지 등과 같은 의제처럼 보다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사회개혁 차원의 문제이다. (기존 ’정치구조가 얼마나 왜곡되었는가?’ 가 국민들의 알권리에 해당하는 일이라면, 광고시장의 85%, 시청점유율 75%를 자랑하는 공중파 방송사들의 독점구조와 그로 인한 폐해들 또한 국민의 알권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지상파 방송사들은 가능한 한 빨리 스스로 현행 독과점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인정하고 어떻게 개혁해 나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청사진을 내와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것은 공영방송사들이 상업논리에 지나치게 얽혀있어서 스스로 문제의 핵심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일부러 무시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새 채널 설립문제를 둘러싼 현재의 담론의 참여자들은 불행히도 ‘구성원들의 커뮤니케이션권이 보다 더 확대되고, 문화적으로 보다 풍요롭게 되어야 할 우리사회공동체의 장래’를 거의 고민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불행히도 새 채널이 생긴다면 ‘현재 방송 산업에 관여된 집단들의 사적 이익이 어떻게 분배될 것인가 ? 그리고 우리집단에게는 어떠한 논리가 유익한가? ’ 라는 식으로 진행되어가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이는 사회 여론을 쥐락펴락할 영향력을 가진 거대 공영방송사와 그와 관련된 미디어관계자들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이런 식의 천박한 논쟁은 우리사회 평범한 구성원들을 더욱 더 무시하는 일이다. 우리의 생각으론 (현재의 논의에서 간과되고 있는) 지상파 독과점이 온존되는 것의 가장 큰 폐해는 첫째, 우리사회의 공익과 공동체 구성원들의 커뮤니케이션권을 파괴한다는 것 둘째, 현재의 공동체 구성원들의 문화적 감수성을 획일화시키는 것 셋째, 공동체의 창의와 상상력을 억제함으로써 공동체의 미래까지 암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새 채널의 설립이 위와 같은 암울한 상황을 해결하는데 유일한 대안인지 아직 판단할 수 없다. 만일 현재의 지상파 방송사들이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스스로 개혁할 청사진을 내올 수 있다면 다르겠으나 그럴 가능성이 희박한 상태이고, 새 채널의 설립이 그런 개혁의 계기가 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검토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새 채널이 기존의 공중파 채널이 운영되는 방식과 가치관을 따르게 된다면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먼저 현재의 독과점 구조가 낳은 폐해가 무엇인지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지상파 독과점으로 파괴된 공익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1) 공익을 담지하지 못하는 현재의 지상파 우리가 생각하기에, 공영방송사들의 ‘최소’의 임무는 그 방송사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거울이어야 하고,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활발한 토론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아가 공동체 구성원들의 표현의 자유, 알권리, 알릴 권리를 포함한 커뮤니케이션권을 보장할 뿐 아니라 확장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현재의 방송사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하다.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1)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함으로써 사회갈등의 조정을 못하고 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기간에 두 소녀가 미군 장갑차에 치어 숨진 사건이 있었다. 방송사들이 앞 다투어 월드컵 관련 프로그램으로 도배를 하다시피했던 그 무렵, 이 사건을 뉴스의 단신으로 취급하는 정도였고, 월드컵 기간이 상당히 지난 뒤에도 심층취재를 하지 않았다. 결국 이 문제는 분노한 시민들이 인터넷등과 같은 대안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나누고 거리로 뛰쳐나와 촛불로 광장을 가득 메운 그 해 겨울이 되도록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대해 KBS 기자의 한 사람은 "(KBS가 이 사건을 심층보도하지 않은 것은) 국익을 위한 것이다.“고 말했다. 이는 물론 당시 KBS의 공식적 입장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이러한 인식에 대해 우리는 미디어 관련자로서도 납득할 수가 없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는 겁이 난다. ‘부안의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를 둘러싸고 엄청난 사회적 논란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그것을 공론의 장으로 내오지 못한 공영방송은 심각한 반성을 해야 한다. 한국에서 모든 매체를 통틀어 매체 영향력 1위를 자랑하고, 단박에 의제화 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가진 KBS와 MBC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의 장을 제공하여 공동체 구성원들의 소중한 에너지가 낭비되는 것을 막았어야할 책임을 지고 있다. 수 만 명의 주민들이 고립되어 절규하고 있는데, 그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해서, ‘고립된 주민들이 방송사는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자신들이 전국으로부터 따돌림 당한다고 느끼게 되어 거의 폭동전야에 이르도록’ 한 것은 ‘도대체 우리에게 공영방송사가 왜 필요한가?’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그와 같이 우리 공동체의 명운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데 공영방송이 커뮤니케이션 기제로서 기여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 생각으로는 방송사들의 시민사회에 대한 우월적 지위 때문인 듯하다. ‘공영 방송사가 시민사회에 대해서 ’할 말 있으면 내 카메라에 말해 ! 그런데 어떻게 편성하고 편집하여 방영할지는 내 맘이야. 우리가 미디어 전문가니까‘ 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시민사회에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 하고 싶은 말씀을 충분히 직접하세요. 기술적인 부분은 우리가 도와드릴께요!‘ 라는 식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것이 ’공공 서비스‘이다. 2) 다원성의 결여 - 다양하고 작은 공동체들 내부의 목소리를 담지하지 못한다. 방송은 다양한 장르와 시각을 담은 내용의 프로그램들이 실험, 방송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시청자들의 문화적 경험이 확대되고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지상파 방송은 민주사회의 기본 전제인 다원화된 사회를 지향하는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다원화된 사회는 여러 가지 상충되는 목표를 가진 수많은 이익집단들로 구성되거나 특별한 문제를 중심으로 일시적으로 연합하는 변화무쌍한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다. 공영방송은 이렇듯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계층간에 대립이 발생할 경우 문제를 공론화시켜 올바른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엄청난 자본과 막강한 물리력을 갖고 있는 거대 공영방송사들은 사회 현상의 겉면을 뒤늦게 맴돌 뿐, 우리사회를 들썩이게 만든 굵직굵직한 사건들에서조차 그 내부를 전혀 비춰 내오지 못하고 있다. 이는 방송사들이 ‘다양성’을 ‘소재의 다양성’ 쯤으로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거나, ‘공정성’을 ‘노출시간의 공평 배분’ 쯤으로 천박하게 이해하여 결국 안이한 양비론에 기대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어느 쪽의 속이야기도 ‘충분히’하지 않는(못하는) 대신, 누구로부터도 욕먹지 않는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지난 98년부터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은 구제금융시대에 돌입하면서 심각한 홍역을 치러내야 했다. 공기업, 민간기업 할 것 없이 수많은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를 감내해야 했고 그것은 전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공영방송사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단기간의 기획으로, 저널적으로 접근하여 양자의 입장을 ‘공평하게 다루는’ 프로그램을 공급하거나, 이미 거리로 뛰쳐 나온 노동자들의 슬픈 모습을 단편적으로 비춰주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이러한 취재 또한 갈등상황이 이미 폭발한 후, 즉 누군가 분신을 해서 죽거나 했을 경우에 ‘취재 거리’를 찾아 뒤늦게 다가가는 방식이다.) 단 하나의 사건이라도, 그 과정의 내부에 결합하여 그 진행과정을 꼼꼼히 관찰하는 방송사나 독립제작사 소속 제작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년간 3조원에 육박하는 산업구조를 가진 우리 방송사들은 새천년 벽두에 우리사회를 뒤흔들었던 ‘구조조정’이라는 거대한 사회현상에 대해 ‘머리띠를 두른 노동자’, ‘노동자의 가족이 흘리는 눈물’, ‘북새통이 된 구직센터’, ‘앞치마를 두른 가장’과 같은 표면으로 이미 드러나 있는, 분절되고 형해화된 영상 이미지만을 남겼을 뿐,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7,000명의 노동자가 한꺼번에 직장을 잃고, 계약직 노동자들이 517 일간이나 회사와 맞서 싸웠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지, 그래서 거대한 구조조정이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각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갔는지를’ 그려내지를 못한다. (우리는 그런 일들은 ‘공영방송사들이’ 당연히 해냈어야 할 공적인 임무이라고 생각한다. ) 그래서 우리의 공영방송은 문서텍스트에 비유하자면, 일간신문의 꼭지기사와 주간지의 추적취재기사, 그리고 매우 드물게 논문과 보고서를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소장가치, 연구가치를 가지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이고, 인류학적이고, 성찰적이고, 예술적인 영상저작물을 생산, 공급하기 힘든 것이다. 3) 시청자 주권의 억압 ‘시청자가 주인되는 방송’ 이란 말은 아직까지 공영방송사들의 수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방송 컨텐츠의 기획에서 송출에 이르는 전 과정 중에 시청자가 ‘주체(주인)’로 참여하는 과정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방송사들이 시청자들을 혹은 오락.교양 프로그램들의 방청객이나 출연자로 참가시켜 ‘시청자와 함께한다’ 라고 호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엄청난 넌센스이다. ) 지상파에서 년간 무려 2만 시간 이상의 콘텐츠가 방영된다. 그 중 시민사회의 꾸준한 노력에 의해 가까스로 KBS에 설치된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 (년간 20시간!)이 [열린채널]이 ‘시민이 제작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설치된 이후 1년 동안 열린채널이 까다로운 운영규칙과, KBS 관계자들의 부정적 태도로 연속 불방되는 사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상영관’ 상영을 주 배급통로로 독립영화를 만들던 일부 독립영화 제작자들은 이 것이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 생각하고, 이 프로그램에 액세스를 시도했다. 그런데, 두개의 독립다큐멘터리 [에바다 투쟁 6년의 기록 -해아래 모든 이의 평등을 위하여]와 [주민등록증을 찢어라]가 불방처분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중 후자를 만든 이마리오 감독은 당시 열린채널 운영협의회원이었던 KBS PD로부터 ‘이런 발상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고, 또 다른 운영협의회원이자 독립제작사 대표로부터는 제목의 ‘찢어라’를 ‘파기하라’로 순화하고 ‘박정희 생가장면을 빼면’ 방영케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어야했다. 이후 불방사태를 두고 30여 명의 독립영화 제작자들은 두 달 가까이 시위를 벌였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한 KBS 직원은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러 나가던 중 마주친 일인시위자에게 ‘데모를 하려면 너희 집 앞에서 할일이지 왜 남의 회사에 와서 난리야!’라고 꾸중을 했다.) 행정소송과 헌법소원을 포함한 양측의 줄다리기가 이어진 후 2년 만에 이 다큐멘터리는 별다른 내용수정 없이 위의 프로그램에서 방영되는 것으로 되었다. 법률이 보장한 ‘퍼블릭 액세스’프로그램의 운영에조차, ‘거대방송사의 지배와 독점의 기제’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제발 그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최근의 한 작은 사건에서도 도대체 ‘시청자가 주인이라는 방송’ KBS의 진짜 철학이 무엇인지 또 과연 스스로 공영성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할지 의심케 한다. 최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무권리의 노예 노동, 간접고용 실태 보고서]는 KBS 비정규직 노동자를 소재로 한 다큐물로, 열린채널에 액세스를 신청했는데, KBS 사측과 노조가 이를 미리 빼내 돌려보고 신청인(주봉희-kbs비정규직노동자)과 제작자(태준식)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겠다며 내용을 수정하라고 종용했다.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은 공영미디어로부터 ‘객체’로만 취급되어왔던 우리 공동체의 시민들이 다른 구성원들에게 자신 생각을 직접 전달하는 장이다. 따라서 당연히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 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방송사를 지배하고 있는 상업적 이익, 독점적 지배의 욕망에 결박된 기자나 PD들이 아닌 우리공동체의 다른 이웃들의 말을 직접 듣는 일이 법률이 보장한 '액세스 프로그램‘에서 불가능하다면, 다른 프로그램들에서는 어떨까 우려가 된다. (2) 공영방송의 공영성 회복은 ‘다양한 공동체 내부의 모습’이 ‘독점 방송사의 입장에 따라 변형되지 않고’ 재현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1) 제작자와 편성담당자가 '상업적인 이해관계와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공영성과 다양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제작주체의 다양화’를 이야기할 때, 보통 ‘기업적으로 영상물을 제작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올바른 분석이 아니다. 외주제작사들과 외주제작비율이 높아졌는데도 프로그램 다양성지수가 하락했다는 보고가 이를 보여준다. ‘제작자들의 숫자가 많아진다고, 당연히 프로그램이 다양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제작자들의 ‘질적 다양성’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첫째, 제작자들이 시선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제작자들이 사회 곳곳의 크고 작은 공동체에 보다 긴밀히 결합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공영방송의 제작주체를 기업이 아니라, 그 공동체의 구성원에까지 확장해야 한다 ( 이렇게 될 때 명실상부하게 ‘시청자가 주인인 방송’ 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독립 영화의 몇 가지 예는 이것이 ‘무리한 발상’이 아니라 ‘가능성’있는 사실임을 보여준다. 예1> 위에 제시된 바 있는 ‘구조조정’ 상황에서, 공동체 내부를 꼼꼼히 관찰하고 그 내부의 목소리를 건저 올리는 일은 (그래서 ‘구조조정’ 이라는 것의 역사적, 사회적 함의를 풍성하게 담은 한 사건의 기록을 영상자료와 텍스트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은) - 엄청난 물리력을 가진 방송사도 아니었고, ‘먹고살기 바쁜’ 독립제작사들도 아니었다. - 오히려 상업적 이해에 결박되지 않은 제작자에 의해 가능했다. 독립영화 [이중의 적]은 1995년부터 [노동자 뉴스 제작단]이라는 단체에 속해있는 노동미디어 활동가이자 영화감독이 2년 동안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제작하여 2002년 인권영화제등을 통해 발표한 독립다큐멘터리이다. (이 영화는 구조조정시기에 하나의 거대한 직장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나갔는가를 제작자의 가치관으로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시선의 다양성은 곧 제작자의 다양하고 자유로운 지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그것은 제작방식, 제작기간의 다양성까지 수반함으로써 콘텐츠의 다양성을 담보한다.’ 는 사실을 보여주는 다른 예들을 ‘독립영화와 그 제작자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예2> 류미례 감독은 지난 4년간 3편의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발표했는데, 그녀는 성직자인 그녀의 남편과 함께 정신지체 장애인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고, 3 살배기 딸과 갓난아기의 양육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최근 제작한 [엄마]는 ‘여성 영화제’의 지원에 의해 만들어 질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일찍이 42세에 홀로되어 억척스레 6남매를 키워내야 했던 감독 자신의 어머니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이후 벌어진 가족들 간에 벌어진 갈등과 그 뒷이야기들을 고백적이고 성찰적인 시선으로 담고 있다. 그녀는 아이를 업고 촬영하기도 하고, 가족 중 다른 이들에게 촬영을 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제작했다. 그녀는 성찰하는 태도로, 자신 가족의 아픈 과거를 드러낸다. 그렇게 하는 것이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동시대인들에게 어떤 참고나 위안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시선은 당연하게도 ‘남의 이야기를 선정적으로’ 취하여 제 나름대로 판단하는 외부인의 태도를 극복하고 있다. 예3> 4편 여의 독립영화를 발표한 최하동하 감독은 [택시](가제목)라는 다큐영화를 제작중인데, 2년째 택시운전사로 살면서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그가 한편의 영화를 만들지 연작을 만들지, 또 몇 년동안 그 일을 할지는 아직 모른다. 예4> 지난해,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상영되기도 한 [D-?] 란 독립다큐멘터리는 유소라라는 고 3 수험생이, 수능시험을 50여일 앞둔 때부터 셀프 카메라 형식으로 자신과 동료들의 수험생활을 찍은 것이다. 방송사들이 입시철만 다가오면 ‘현행 교육제도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죽어간다 ! 그렇지만 고 3수험생 여러분들은 지혜롭게 극복해야한다’는 식의 빈약하고 상투적인 ‘어른 중심의 가치관과 서사’로 일관하여 콘텐츠를 만들어 내거나, 교실에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다’는 다소 과도한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몰래 카메라’를 교실 천정에 설치하는 방법을 동원하고 있을 때, 이 영화는 꿋꿋이 ‘수험생 자신의 시선과 화법으로’ 으로 그 내부의 상황을 그려낸다. 예5>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을 수상한 ‘김동원 감독’의 [송환]은 비전향 장기수들의 남한에서의 생활, 주위와의 이러저러한 교류, 그리고 북으로의 송환과정을 담고 있다. 그는 12년 전 출소하여 갈 곳이 마땅치 않은 비전향 장기수들을 자신이 속해있는 빈민촌 공동체로 모셔와 12년 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VHS, 8mm, DV 등 다양한 포맷의 비디오 테잎에 1,200시간 분의 촬영본을 담았다. (2시간 30분으로 편집된 이 영화는 최근 MBC 편성담당자로부터 600만원에 방영권을 사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위와 같이 독립영화 제작자들이 돈이 없어 허덕이면서도, 오랜시간 몸과 혼을 들여 공들여 만든 영상 콘텐츠들이 당당한 영상창작물로서 방영되어야한다고 믿는데, 이렇게 제작된 영화들은 방송사로부터 외면당하기 일쑤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제작방식(즉 제작자가 오랜 기간, 작은 공동체들의 내부에 들어가 호흡을 같이하며, 깊은 성찰의 과정을 거치며 우리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영상자료로 남기는 일)은, 산업적 이해에 결박되어 있고 고액의 운영비와 인건비, 제작비를 유지해야하는 현재의 방송사들로서는 (호랑이나 바다사자 같은 야생동물을 추적하여 찍는 환경 다큐멘터리를 제외하고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제작자의 다양화’가 ‘상업적으로만 일하는 전문회사들이 많아지는 것’으로 편협하게 이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다양한 사회적 지위의 제작자들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문제를 자기의 시선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수험생, 농민, 택시운전사, 노동조합원, 사회복지사, 아기엄마, 소설가, 환경운동가, 야학교사, 이주노동자)이 제작의 주체로 참여하거나, 아니면 보다 많은 ‘자유로운’ 제작자들이 자신의 선호하는 주제에 부합하는 다양한 공동체로 들어가 그들과 깊이 소통하며, 다양한 제작방식을 구사하고, 다양한 제작기간을 갖고, 다양한 실험을 해보고, 표현양식도 다양한 작품들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 프로그램의 다양성뿐 아니라 질도 높일 수 있는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된 작품들이 공영방송을 통해서 같은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과 소통을 하게 해야 한다. 지금까지 방송물은 제작자들은 여전히 ‘고학력을 갖고 고급직장에 소속되어 있는 청장년 남자 제작자들의 독과점’ 이어서 시선과 표현양식도 그로 인한 한계를 쉽게 넘기 힘들다. 따라서 현재의 구조가 유지되는 한 모든 방송물은 ‘시선’과 ‘가치관’면에서 내재적 한계를 갖는다. (그것은 해당 방송사의 PD 기자의 시선과 ‘방송사’의 가치관을 벗어나기 힘들다.)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인 [열린채널]운영자들은 이를 통해 방영되는 모든 콘텐츠는 방송 전후에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가 직접 제작한 것이고, KBS의 견해와 다를 수 있다.’ 고 명시하도록 하고 있다. ‘다양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가 보기에 이는 ‘[열린채널]을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은 KBS가 기획. 제작(혹은 하청제작)한 것이어야 하고, 당연히 KBS의 외주제작 담당자의 견해와 심미안에 일치해야한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이것은 ‘KBS 직원들의 방송’이지 ‘국민의 방송’이 아니다. 또 MBC PD들은 아예 ‘시청자가 보지 않는 프로그램은 만들지 않는다.’ 고 공공연히 말한다. ‘시청률이 높아서 광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프로그램과 시청자들에게 익숙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한 프로그램이 경합할 때 전자를 취하리라는 것이 명확해 보인다.’ 이런 태도 속에는 ‘다양성’이 숨쉴 틈이 없다. 프로그램이 다양해지려면 첫째, 다양한 ‘입장, 성격, 가치관, 심미안, 취재대상을 대하는 태도’를 가진 자유로운 제작자들이 방송사 외부에 많아져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특정 방송사의 압력을 받지 않고 콘텐츠를 생산해낼 수 있어야한다.) 둘째, 그렇게 다양한 제작자들의 창의와 소신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물리적인 환경도 아울러 마련되어야한다. 셋째, (이점이 가장 중요한데) 방송사와 제작자가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프로그램’을 시청자들에게 써비스하기 위한 허심탄회한 토론과 협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지상파 독점구조 속에서 모든 방송물들은 독점적이고 우월적인 지위를 가진 방송사(의 편성/외주담당자)가 방영을 결정하고, 이를 이용해 내용과 표현양식에 깊숙이 개입한다. 따라서, ‘시선, 주제 표현양식의 다양성은 최소한 두 개의 (강력한) 방해물에 걸리게 된다. 하나는 제작사의 생존을 위한 제작기간과 제작비 절감을 위해서 충분한 여유를 갖고 작품생산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사에 불리한(불리할)것이라거나 시청률 확보에 자신이 없다고 판단되면 이를 막고 봐야하는 외주하청구조이다. 그 결과 한반도의 주민들은 ‘이미 충분히 시청률 지상주의에 오염된, KBS와 MBC의 데스크가 허용하고 통제하는 프로그램만’을 공급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다. (3) 이 상황의 최대의 피해는 우리 사회 공동체의 건강한 성찰의 힘, 대화 능력과 다양한 감수성, 그리고 상상력이 옭죄어지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40대 이상 세대는 [대한 뉴스], [배달의 기수], [꽃피는 팔도강산] 등과 같은 ‘홍보성(?) 프로그램’이외에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이해하게 해주는 다큐멘터리’ 를 보지 못한 채 청춘을 보냈다. 동시대의 다른 구성원이 가지고 있었을 감수성과 세계관은 공공 써비스받지 못했다.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들은 이미 tv에서 멀어졌다. 그들에게 tv는 ‘뉴스통’ 이거나 ‘자식세대들을 위한 오락기’ 정도의 의미로 되었다. 지금의 공영 방송은 위와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아야한다. 자라나오는 청소년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다양한지, 우리 공동체의 구석구석에서 얼마나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풍부하게 느끼고, 성찰할 수 있도록 할 임무를 갖고 있다. 그들이 상업적인 이해관계에 얽혀 단기에 급속 제작한 감각적인 오락 프로그램들에만 취해있게 해서는 안 된다. 4. 새 채널 설립 논의의 중심에 놓여야할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 발제를 마무리하며 지금까지 얘기한 외주채널 설립 논의에 대한 우리의(한국독립영화협회) 입장을 다시 한번 밝히자면 아래와 같이 정리 할 수 있다. 첫째, 지상파 방송사들이 공영방송으로써 책임 있는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공익성 회복을 위한 구체적이고 조속한 개혁의 실천을 기대한다. 둘째, 그러나 지금과 같은 독과점적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없다면, 우리는 공공써비스로서의 방송의 공익성 증진과 영상문화의 편협함 극복을 위해, 새로운 채널이 그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적극적으로 고민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셋째, 현재 외주 채널 설립 논의과정에서는 (지금까지 이해당사자들에게서 외면당하고 있는 주제) 즉, ‘공동체의 문화적 다양성 및 감수성의 증폭과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권리의 신장’ 을 중심의제로 확고히 잡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찾아내는, 책임감있는, 성실한 토론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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