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 - 제작일지 :: 2004/06/07 15:26

촬영 2. 9 영화인회의, 한국독립영화협회는 기자회견을 통해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총선연대 활동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기로 하였다. 2. 14 한국독립영화협회 다큐분과 모임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결의했고 영화인회의가 필요한 재정을 대기로 하였다. 먼저 다큐작업에 착수해 있던 서울영상집단의 이안숙과 이후 연출 의사를 밝힌 오정훈이 공동으로 작업하기로 의견이 모아졌으며 일단 당장 촬영에 들어가면서 나머지 스탭들은 한독협 안팎에서 두루 찾아보기로 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왔다가 바뀌는 가운데 작업이 시작되었다. 3. 11 조연출이 확정되면서 다큐멘터리 제작팀의 최종 모양새가 갖춰졌다. 기획은 내부와 외부로 나눠 김시천과 이주영이 나눠 맡기로 하였으며 연출은 오정훈과 이안숙이 그리고 조연출은 구선희, 서울지역 촬영은 김재훈이 맡기로 하였다. 이 중 김시천 PD는 부천 영화제 업무가 바빠지면서 불가피하게 중도하차하게 된다. 우리의 제작 기조는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을 중심에 두되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 그래서 총선시민연대의 활동뿐만 아니라 시민운동 전반에 대해 냉철한 평가와 전망-가능하다면-을 제시하는 것. 일단 각 지방에서의 촬영팀들은 거의 조직이 되었고 우리는 서울과 수도권의 상황을 잘(!) 촬영하기로 한다. 3. 15 서강대에서 열린 4.13. 총선 캠퍼스 대토론회를 촬영하였다. 넓은 강당에 모인 총인원이 서른 명이 채 되지 않는 썰렁함이라니. 젊은 층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다시 한 번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3. 20 일주일 간 전국을 도는 버스 투어가 시작되었다. 서울에서는 그 동안 유권자 서명운동을 벌인다. 우리도 두 팀으로 나눠 지방과 서울을 동시에 촬영하기로 하였다. 투어 촬영팀은 투어단의 활동을 촬영하면서 미리 꾸려놓은 지역촬영조직의 상황을 점검하고, 서울팀은 유권자 서약운동 촬영에 주력한다. 3. 23 탑골공원의 민가협 목요집회에서의 유권자 서명운동 촬영. 집회를 계속 지켜보는 벽안의 노인이 눈에 띄었다. 후일 알고 보니 이 분이 바로 얼마 전 고인이 되신 서 로베르또 신부님이셨다. 이후 신부님은 우리가 촬영하는 집회에는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내셨다. 인터뷰도 했었는데 작품에서는 쓰지 못해서 아쉽다. 신부님, 좋은 곳으로 가셨겠지요....... 3. 28 총선연대 후원의 밤. 그간의 총선연대활동을 보여주는 영상물을 만들어 틀기로 했다. 모든 기한이 정해진 일들이 그렇듯이 행사 시작 5분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초재기를 했다. 드디어 자막작업까지 마무리하고 테이프로 옮기고 있는데 에러가 났다. 아, 쿼바디스 도미네! 쉴 새 없이 전화기는 울려대고...... 어찌어찌하여 간신히 작업을 마치고 오토바이로 붕, 실어 날라 행사 시작 0.000001 초 전에 극적으로 도착, 무사히 틀기는 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말하더라. "와, 저렇게 영상으로 보니 좋네요." 3. 29 구성회의를 하면서 작품에서의 중심인물을 선정하였다. 선정 기준은 촬영에 호의적이고 내부 사업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이야기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그냥, 직관이다. 2층 사무실의 송옥진씨, 김타균씨, 4층의 김혜정씨, 이태호씨, 임지애씨 등. 4. 3 최종 낙선명단 발표의 날. 전날의 의정부회의에서부터 따라 들어가 촬영을 하였다. 명단 발표 후 거리 행진 촬영. 이제 본격적인 낙선운동의 시작이다. 4. 5 촬영계획 다시 점검. 서울에서는 종로, 강동 송파, 부천의 낙선운동을 중심으로 촬영할 예정이다, 강동 송파 지역에는 자체 촬영팀이 꾸려져있기도 하다. 그 외 각 지방들은 지역 촬영자들이 수고를 해 줄 것이다. 모두 화이팅! 4. 8 2차 전국 버스투어를 계획하였으나 무산되었다. 대신 총선연대의 대표진들이 구리, 임실 등 지방의 집중 낙선지역을 하루씩 방문 중이고 우리도 쫓아가서 촬영 중. 그리고 오늘은 레드 페스티발. 대학로에 꽉 찬 인파를 보면서 이들이 다 투표를 제대로 할까, 그저 공연만 보러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행사는 잘 치뤄졌다. 4. 11 선거 이틀 전. 수도권 버스투어가 있었다. 코스는 남양주(이성호)-->구리(이건개)-->강동을(김중위)-->종로(이종찬)-->부천(이사철)-->인천(이강희). 종로에 도착해서는 서울지역 낙선자 명단이 적힌 대형 현수막을 내리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커다란 빌딩을 가득 채우며 내려오는 현수막과 낙선, 낙선, 구호들! 현수막을 건 후 빌딩을 타고 내려오던 암벽등반 전문가가 로프가 짧아 대롱대롱 매달리는 긴급상황이 발생하였으나 잠시 후 무사 착지. 그렇게 고생스럽게 걸렸던 대형 현수막은 5분도 못 버티고 철수되었다. 아까워라...... 다음 도착지인 부천에서는 난리가 났다. 달려들어 피켓을 마구 부수고 폭언을 퍼부어대는 것은 이사철 쪽 운동원들의 단골 메뉴이니 별로 새롭지도 않았지만, 이번에는 아예 떼거지로 집회용 소형 트럭을 에워싸서 대표진과 버스에 탄 활동가들을 갈라놓아 버렸다. 대표를 잃은 처량한 버스는 슬피 울며 헤매다 걸레 꼴이 된 트럭과 겨우 상봉을 하여 부둥켜안고 울며불며 인천으로 갔다는...... 그런 전설이. (전설의 사족, 우리의 터프한, 정의의 화신인 촬영감독은 부천 촬영 내내 이사철쪽 아줌마들의 공격대상 제 1호였다는.) 4. 12 선거 하루 전. 어디서나 마무리는 촛불이다. 명동성당에서의 촛불집회를 마지막으로 낙선운동의 숨가쁜 일정은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4. 13 드디어 선거일. 제작팀도 각자 투표를 끝낸 후 총선연대 사무실에 마련된 선거개표상황실로 모였다. 출구조사집계방송의 시청은 과장을 좀 붙이자면 거의 축제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예상보다 훨씬 높은 낙선율에다가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이라는 반가운 소식까지! 그러나 전체 투표율은 저조했고, 경상도 지역에서의 (예상되었던) 참패와 노무현 후보의 낙선은 선거결과를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게 만들었다. 결과가 속속 집계가 되자 이사철, 김중위의 낙선은 확실해졌고 정형근의 압승 역시 확정되었다. 앗, 그런데 민노당, 민노당, 민노당이여....... 여기까지,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은 성공리에 막을 내렸고, 110개를 넘는 DV 테입과 함께 촬영도 끝이 났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 편집과의 전쟁, 요이 땅! 편집 5. 2 지역의 촬영본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는 중. 모두 합치면 50여개 정도 분량이다 각 지역에서 격은 낙선운동의 어려움과 활동가들의 노고가 생생히 담겨있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5. 20 2주로 끝내기로 했던 스캐닝 작업이 예상보다 오래 걸리고 있다. 지금은 한창 편집 중이어야 하는데 아직 스캐닝도 완료가 안되었다. 참고로, 4월 23일날 만들었던, 우리의 야심에 찬 1차 일정표를 보시라! 4.13-5.7 : 스캐닝 완료 5.8-5.13 : 1차 구성안 작성 5.15-5.20 : 2차 촬영 (인터뷰) 5.15-6.10 : 1차 가편집 및 시사 6. 6 구성안 토론. 일단 아래 3가지의 쟁점을 축으로 하여 살을 붙여나가기로 하였다. 1) 낙선운동의 성과와 한계는? 2) 지역감정의 실체란 무엇이고 극복 가능한가? 3) 시민 운동의 현재 모습에 대한 비판적 접근 ---> 낙선 리스트 발표 이후 시간 축에 따른 낙선운동을 중심으로 쟁점들을 배치. 6. 9 여러 차례의 구성회의를 거쳐 드디어 본격적인 편집 시작. 앗 아기(데크)가 사정없이 울기 시작했다. 이 일을 어쩌나. 잠시 아기를 달래자. 아기가 진정되는 동안 종이 편집을 먼저 하기로 했다. 6.16 컷편집 시작. 그러나 또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XL-1으로 촬영한 소스의 사운드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원인은 채널 문제. 소스의 사운드는 채널이 두 개인데 캡쳐카드인 DV렙터의 채널은 하나. 두 개가 하나로 합쳐 들어가면서 서로 부딪혀 소리가 충돌하는 것이었다. 소리가 거의 안 들리는 인터뷰라니! 망연자실 앉아 있다가 일단, 사운드는 무시하고 무조건 붙여놓기로 하였다. 7. 26 5시간짜리 1차 가편집을 마치고 회의. 애초의 편집 기조를 그대로 가져가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총선연대 활동가들의 고민과 갈등을 담으려고 노력했지만 화면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고, 지역감정의 실체 또한 인터뷰에서의 몇 마디 말만으로서는 도저히 표현될 수가 없었다. 특히 송옥진씨의 경우 시민운동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솔직하게 잘 보여주었는데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지 않아서 눈물을 머금고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 강동 송파 지역의 낙선운동을 통째로 들어내는 것에도 아쉬움이 컸다. 대신 현장감이 생생히 살아있는 각 지방의 낙선운동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기로 하였다. 7. 31 편집은 대충 모양새를 갖춰가고, 사운드 문제의 해결방안도 찾아내었다. 누구든 프리미어 편집시 사운드에 문제가 생기면 푸른영상의 오정훈 감독에게 달려가시라. 짜짜짜짜짜짱가 신기한 힘이...... 8. 3 부산영화제 심사에 제출할 90분짜리 가편집본을 완성하였다. 가편집본을 감상한 우리의 공통된 소감. 이건 액션물이야! 으하하하, 눈물나게 재미있다,는 뻔뻔스런(?) 자화자찬. 8. 6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음주에의 욕구도 애써 꾹꾹 누르며 묵묵히, 1분 1초의 휴식도 없이 작업을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8월 6일 오후 7시 35분 28초, 절대 잊을 수 없는 시각, 전화에서 들려오는 소리. "나 지금 뭐하게? 정동진에서 바다 보며 소주랑 회 먹고 있지롱!" 문제적 인물 이주영, 당신 우리 피디 맞아?! (이걸로 복수 완료.) 8. 8 실무자들의 최종 인터뷰 촬영에 들어갔다. 각 상황을 설명, 정리해주고 마무리에서 낙선운동의 평가와 시민운동의 방향을 짚어주는 역할을 할 인터뷰이다. 서울의 총선연대 참여단체들과 원주, 부산 등의 지방들을 돌아다니며 촬영할 계획. 8. 26 제목이 확정되었다. 먼저, 후보작들과 탈락이유: 우리는 왜 여기에 모여있는가-너무 진부하다. 다시 출발선에 서다-무슨 육상 영화 찍냐?! 레드 카드-레드 헌트의 아류작 같다...... 모두들 머리가 거기에서 거기인지라 맞대봐야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낙찰된, 얼핏 보면 평이한 듯하지만 특별한 제목, <낙선-Power of the People>. 낙선! 낙선! 오호라, 들을수록 좋은 제목이다. 선거 하루전날의 대전 집회를 보시면 <낙선>이 얼마나 딱 맞아떨어지는 제목인지 아시게 될 겁니다. 8. 29 3차 편집본으로 몇몇 분들을 모시고 내부 시사회를 가졌다. 씹히기 위해 만든 자리였긴 했지만 정말 열나게 씹혔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주신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 드립니다. 각자 만드시는 작품들 완성하시기 전에 꼭 불러주세요! 잘 씹어드리겠습니다. ^^;;;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일상적으로 이런 평가의 자리를 조직하면 좋겠다는 생각.) 9. 19 드디어 영어자막까지 넣은 완벽한 최종판이 완성되었다. 3월에서 9월까지의 나날들이여, Adieu! Adios! 이제는 정리할 시간. 추위가 채 가시지 않았을 때 카메라를 들고 처음 모였고, 무더운 여름을 편집기와 씨름하며 함께 보냈다. 이제 슬슬 찬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다. 작업을 마친 지금, 감회가 새롭다. 그간 서로 맞지 않아 다투기도 많이 했고, 홧김에 집어던져 부서진 의자도 부지기수였다. 토라진 감독들을 화해시키느라 이리 저리 뛰어다니던 이피디의 당황한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편집하다가 응급실 실려가는 일은 이제 제발 그만!......이런 따위의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됨이 못내 실망스럽다. 여기서 다시 리와인드. 6-7개월간 내내 쌈구경에 대한 기대를 갖고 지켜보았지만 두 감독들은 서로 얼굴 한 번 붉히지 않았고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다. 마치 오누이처럼 다정스런 모습들이라니. 에이 재미없어. 이렇게 사람들이 좋아도 되는 거야? 오 모 감독이야 용모라도 좀 처지지만(용서하십시오) 이 모 감독, 예쁘고 늘씬하고 똑똑하면서 그렇게 인간성까지 좋아도 되는 거야?! ......그렇다. 우리는 정말 드림팀이었다. 개인적으로, 촬영과정에서는 인간 일반과 세상에 대한 신뢰가, 제작의 전 과정에서는 구체적인 인간 하나 하나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내 마음속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었고, 좋은 경험이었다. 참, 이 말 빼먹으면 혼나지. 편집공간과 맛있는 식사와 가끔은 훌륭한 잠자리까지 제공해주신, 디프런트 센스를 가진 디지털 컨텐츠 크리에이티브 그룹 <미동>의 모든 식구들께 감사의 마음을, 총선시민연대에서 활동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와 건투와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음악감독님, 사람들이 우리 음악 무지무지 좋대요! 모두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꾸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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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 - 연출자 필모그라피 :: 2004/06/07 15:19

오정훈 1968년생 1994녀 푸른영상 가입 1995년 <약속 하나 있어야겠습니다> 연출 1995년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다> 조연출 1997년 <세 발 까마귀> 연출 1998년 <세 발 까마귀> 제 3회 부산 국제 영화제 초청 1999년 <세 발 까마귀>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타리 영화제 초청 2000년 <낙선> 공동 연출, 제 5회 부산 국제 영화제 와이드 앵글부문 출품작 이안숙 1973년 생 1995년 졸업작품 <여자이야기> 연출 1996년 청주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1996년 서울 영상 집단 활동 1997년 <변방에서 중심으로 : 독립영화에 대한 특별한 시선> 조연출 1997년 제 2회 부산 국제 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 출품작 1998년 <본명선언> 조연출, 제 3회 부산 국제 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 다큐멘타리상 수상 2000년 <낙선> 공동 연출, 제 5회 부산 국제 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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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 - 연출의 변(이안숙) :: 2004/06/07 15:19

작업은 끝났다
이안숙
작업이 끝났다. 기쁨도 잠시 연출의 변을 써야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어서 써야지... 작업도 끝났는데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고 쓸까? 아니면 모든 것이 아쉽다고 쓸까? 아니 솔직하게 아직도 작업과 불리 되지 못하고 있는 내 상태에 대해서 말해야 할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솔직히 아쉽고 낯설다. 2월에 시작한 작업이 9월에 끝이 났으니. 휴가는 꿈도 못 꾸고... 2000년이 시작될 즈음 선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선의 가능성이 희박한 어떤 후보를 통해서 선거와 세상에 대한 순진한 나의 기대를 말하고 싶었다고 나 할까? 그때 마침 낙선운동을 한다는 총선연대의 기자회견이 있었고, 이번 선거는 재미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독립 다큐멘터리를 하는 사람들과의 공동작업을 하게 되었다. 선거라는 공간이 후보자와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틈새에서 연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말이다.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볼 수 있기도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는 어떤 새로운 기운을 느끼기도 하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대한 나의 순진한 기대이다.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변화란 아주 작은 개인의 움직임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것...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다큐멘터리 작업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다큐멘터리를 하는 이유는 내가 가진 무수한 편견들과 솔직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희석시키는 자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세상과의 만남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업은 시작됐다. 안국동, 총선연대 사무실을 문턱이 닳도록 왔다갔다하고, 카메라를 들고는 다니지만 방송국 사람들은 아닌 약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인 우리들을 처음에는 낯설게 대했지만, 그래도 자꾸 보니까 익숙해지는지 헤어질 때쯤에는 무엇을 먹고사는지 걱정을 해주기도 했다. 선거는 그렇게 4월 13일에 끝났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후반작업에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선거가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완성을 하지 못했냐고 원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난 것은 당락의 결과가 정해졌을 뿐 작업의 끝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난감함과 부담감으로 편집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보낸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그러나 테이프는 내앞에 쌓여있고, 너무 많은 사건들과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가치 있어 보이기도 하고 모든 것이 불만족스럽기도 하고 시간이 지날 때마다 마음은 자꾸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토론과 서로의 생각들은 설득해 가면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편집 구성안 작업을 통해 조금씩 머릿속이 정리되고 화면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편집은 내용적인 부분은 물론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현재를 기록하는 우리라는 것이었다. 현재에 매달리지 않는 이상 끝은 없을 테니까. 부족해 보여도 아쉬워도 촬영은 끝났고, 그것을 마무리 짓는 일은 작업자의 몫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 아쉬움에 대한 보답처럼 지역에서 올라온 테이프들은, 사람들의 활기찬 숨소리를 느끼게 해주었다. 내가 볼 수 없었던 지역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를 향해 힘을 내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그들은 장미꽃을 나누어주고, 거리 한복판에서 구호를 외치면서 나에게 새로운 활력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작품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시작된 편집작업은 1차, 2차, 3차를 거쳐가면서 조금씩 다큐멘터리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너무 아쉬워 자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을 하나씩 버려가면서 그리고 모니터 시사를 통해 내가 볼 수 없었던 부분들을 찾아내고, 수정하면서 그렇게 편집작업은 아쉬움 속에 끝이 났다. 화면 속에 사람들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서 언제쯤 객관적으로 이 영화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2000년을 기억할 때 한편의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 작업에 도움을 주신 분들과 함께 작업한 스텝들 모두 함께 만들어간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웠고, 그것이 다큐멘터리의 또 다른 매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함께 한 분들도 그런 매력을 느꼈던 작업이기를 희망한다. 이제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분들에게도 지루하지 않은 84분이었으면 좋겠고, 나의 순진한 기대가 무뎌지지 않는 앞으로가 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제 고생 끝 행복시작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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