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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열 - 스틸(still) :: 2004/05/31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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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열 - 비제도권 영화, 운동의 새로운 전망(비평글) :: 2004/05/31 23:05

전열 - 비제도권 영화, 운동의 새로운 전망
글쓴이-이순진
80년대 초반 이후로 구성원의 저변 확대와 제작물의 양적인 팽창을 계속해오던 영화 운동은 87년 대중 운동의 고양기를 맞아 질적인 성숙을 이루었다. 대학 영화패와 영호과 출신 성원들로 구성된 장산곶매는 16mm 장편 극영화 [오! 꿈의 나라]를 시발로 [파업전야], 그리고 최근의 [닫힌 교문을 열며]에 이르기까지 극영화 부문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바 있다. 또한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를 기록해 둔다는 초보적인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 다큐멘터리 영화 운동 진영은 [상계동 올림픽], [깡순이, 슈어프로덕츠 노동자], [노동자 뉴스] 시리즈, [삶의 자리, 투쟁의 자리] 등을 거치면서 보다 질 높은 다큐멘터리 창작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사회 정세의 변화와 영화 운동의 발전, 그리고 다큐멘터리 창작자들이 갖게 된 새로운 차원의 문제 의식 등이 결합됨으로써 나올 수 있었던 성과물 중의 하나가 다큐멘터리 작가회의의 [전열]이다. 90년 [파업전야]에 대한 정부 당국의 탄압에 공동으로 대처할 필요성을 인식함으로써 모이게 된 5개의 영화집단들은 이후 [파업전야 탄압 분쇄 공동투쟁위원회]를 상설적인 논의 테이블로 전환하였다. 이 상설적인 논의 테이블 속에서 서로가 연대할 수 있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모인 전문가 집단이 탄생하게 되었다. 각 집단에서 활동하던 다큐멘터리 창작 구성운들이 모여 구성한 다큐멘터리 작가회의는 그러한 전문가 집단 중의 하나이다. 그들이 내놓은 [전열]은 작품 외적인 측면이나 작품 내적인 측면에서 모두 이전 영화 운동의 성과를 받아내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작업으로 평가할 만하다. [전열]의 출발점은 기존으 다큐멘터리 창작 방식과 그 보급 방식이 갖고 있는 한계에서부터 비롯된다. 즉 [전열] 작업팀이 갖고 있던 문제 의식은 다큐멘터리 제작에 있어서 수공업적인 방식을 탈피하고 체계적인 제작 구조를 수립하는 것,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노동 계급의 정서로 담아내는 것, 그리고 보다 체계적인 보급망을 구축하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사실 아직까지도 영화 운동 진영이 풀어야 할 과제이고 한두 편의 작품 활동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열]이 가지는 의의는 그것이 이러한 문제들을 풀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며 모범적인 보기라는데 있다. [전열]의 작업 방식 중 특기할 마한 것은 기획팀과 제작팀의 분리 운영, 그리고 현장과의 긴밀한 공동 작업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극영화의 경우 기획과 연출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상식이지만, 다큐멘터리는 그전까지 명확한 역할 분담이나 체계적인 제작 구조가 정착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전열] 기획팀은 정세 분석을 통해 작품의 내용적 기조를 잡아내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현지 촬영자에 대한 체계적인 촬영 교육을 실시하였다. [전열]의 생생한 현장 화면들은 바로 이러한 과정의 결실이다. 또한 기획팀은 작업을 위한 갖가지 교섭을 진행하고 일정 짜는 일을 도맡음으로써 제작팀으로 하여금 창작 방법에 대한 고민에 집중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그동안 다큐멘터리 성원들이 가졌던 문제의식, 즉 보다 질 높은 작품 창작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제작 구조가 정착되고 그 속에서 활동하는 성원들이 보다 전문화된 자기 영역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전열]의 성과는 그러한 문제 의식을 발전시키는데 긍정적인 결과를 남겼다는데 있다. 현장과의 결합은 주로 현지 기획자, 현지 촬영자와의 공동 작업, 그리고 현대중공업 노조를 통한 보급 등으로 이루어졌다. 노동 계급의 사상과 정서를 온전하게 담아낸다는 것은 사실 전문적인 영화 활동가들에게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지만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다. 현장과의 지속적인 연대와 공동 작업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방안이면서, 또한 작품을 통해 많은 대중과 조직적으로 만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사실 이 문제는 다각도로 검토되어야 할 중요한 사안이며 [전열]의 작업 방식이 거둔 성과와 문제점들은 보다 심도 있게 논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주로 [전열]이라는 작품 그 자체가 가지는 성과와 한계를 짚어볼 것이다. 영화 운동 진영에서 생산된 작품에 대한 꼼꼼한 분석은 매우 필요한 일이고, 그것 역시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몫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남한 변혁운동을 이끌어가는 대공업 노동자, 특히 그 중에서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삶과 투쟁을 담아내어 우리 노동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해 본다는 의도로 기획된 다큐멘터리 [전열]은 91년의 5,6월 투쟁을 담은 프롤로그로부터 시작된다. 시위대와 전경들의 충돌, 고 강경대군 어머니의 인터뷰, 산업재해 노동자들의 시위 장면을 담은 프롤로그는 고 박창수 위원장을 매개삼아 울산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게로 연결된다. 작품이 전개되는 방향을 예시해주는 프롤로그의 기능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프롤로그 구성은 그다지 새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적절한 것이다. 일반적인 것(전반적인 사회 정세)에서보다 구체적인 것(현대중공업)으로 들어가는 이러한 구조는 [전열]에서 어느 정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프롤로그를 포함한 작품 전체의 구성을 이해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하다. 현중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사회정세와의 관련성 속에서, 그리고 역사적인 관점에 입각해서 그리려 했던 의도가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구성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도에 따라 [전열]은 時(현재와 과거), 空(서울과 울산)을 넘나드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프롤로그에 이어 우리는 87년 당시의 투쟁 모습을 보고, 그때를 회상하는 해고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당시를 ‘본능적 분노’의 폭발로, ‘인산다운 삶의 희열을 맛보았던 시기’로 회상한다. 그가 길을 걸어가 화면 밖으로 사라질 때, 나레이션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현재의 투쟁을 선언한다(“오늘 우리의 투쟁은 시작이다.”). 이어서 뛰어가는 노동자들은 집회 장소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겠지만 [전열]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뛰어가는 노동자들’이라는 메타포는 노동 계급의 역동성, 역경을 뚫고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는 진취성을 나타낸다. 집회와 쟁의 행위 찬반 투표, 해고자들의 복직 투쟁 모습, 협상 테이블로 들어가는 지도부의 모습이 이어지고 곧 이어 실의에 빠져 앉아 있는 두 명의 노동자 모습이 보이면서 단협은 끝이 났다는 나레이션이 나온다. 이것은 현재 진행 중인 단협 투쟁의 과정과 쟁점을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정영빈을 비롯한 해고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이고, 징계위원회를 노사 동수로 구성하자는 노조측 안이 정당함을 설명하는 나레이션에 의해 단협 투쟁의 쟁점이 해고자 복직 문제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단협 투쟁의 쟁점과 의의가 충분히 설명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단협이 진행되는 과정을 (아마도) 시간 순으로 보여주는 집회와 찬반 투표 현장, 그리고 협상 테이블로 들어가는 지도부의 모습 사이사이에 끼어든 해고자들의 복직 투쟁 장면이 이번 단협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관객은 나중에 나레이션이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게 된다. 이것은 역으로 자료 화면이 말해주는 바가 상당히 모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복되는 집회 장면은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지도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노동자들이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열망, 그리고 그 내용을 전달하기에는 투쟁 의지만을 강조하는 지도부나 박수치고 노래하는 노동자들의 별 변화 없이 담아내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현재의 집회 장면은 87년의 투쟁이나 과거 128일 투쟁을 담은 집회 장면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현재성이 부각되지 않음으로써 역사성 역시 부각되지 못한다. 그것을 어느 정도 메꿔 주는 것이 나레이션의 역할이지만, 이 부분에서 나레이션은 충분한 정보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단협이 실패했음을 알리는 다음 장면의 경우는 무겁게 가라앉은 현장 분위기만으로도 그들의 좌절감, 패배감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사용된 주관적 나레이션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화면은 마치 TV 뉴스 화면처럼 나레이션에 종속되어 있는데 비해, 나레이션의 정보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화자의 감정은 절제되어 있지 않다. 전반적으로 정보의 부족은 현중을 제외한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나 일반 관객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전열]이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그 일차적인 관객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품의 완결성을 따져볼 때 이는 역시 결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전열]이 갖고 있는 구조가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에 충분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음으로써 현중 노동자가 아닌 관객들이 작품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은 벅찬 일이 되었다. ‘구속동지 석방 환영대회’를 기점으로 나레이터는 이영현 위원장으로 바뀐다. 그를 통해 현장의 무거운 분위기는 잘 전달된다. 텅 빈 운동장에 환청처럼 울려 퍼지는 투쟁가 소리, 그리고 이영현 위원장 대신 단협 투쟁을 이끌었던 우기하 부위원장이 연설할 때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조합원들. 이를 바라보는 이영현 위원장의 안타까운 마음에 관객은 동화된다. 곧 이어 정영빈, 서영택의 인터뷰를 통해 이번 단협 투쟁에 대한 일정한 평가가 내려지고 메이데이 행사에 대한 사측의 부당한 탄압, 그리고 집회 장면으로 연결된다. 단협 과정을 다루는 앞부분에 비해 이 장면의 분위기는 상당히 가라앉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단협 과정에 참가하지 못했던 이영현 위원장의 시점을 통해 그런대로 잘 전달되고 있다. 하지만 단협에 대한 평가 부분은 여전히 미약하다.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짐으로 해서 패배 의식의 진원지가 밝혀지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조직적 대안’ 역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협에 대한 일정한 평가를 의도한 인터뷰 내용은 패배라는 진단만 있을 뿐 그것의 원인에 대해서는 뚜렷이 말해주는 바가 없다. 물론 이 문제는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므로(특히 울산 현지에서) 건드리기 쉽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은 할 수 있지만, ‘선명한 입장으로 투쟁을 이끌어가지 못한 지도부의 문제, 그리고 힘을 실어주지 못한 조합원들의 문제’로 패배의 원인을 일반화시킴으로써 작품의 힘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과 같은 맥락에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나레이터의 문제이다. 이영현 위원장의 시점을 가진 나레이션은 현장의 무거운 분위기를 전달하고 현대중공업의 노조 위원장으로서, 또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패배 의식에 젖어있는 조합원들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위원장으로서 그가 가진 구체적인 고민과 단협 패배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는데 나레이션은 매우 조심스럽다(물론 시간상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엄격하고 정밀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을 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거의 128일 투쟁으로 이야기가 넘어가면서 이영현 위원장은 ‘나’에서 ‘그’로 돌아오고, 이후에 그의 모습은 몇 번 피상적으로 화면에 비칠 뿐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은 되지 못한다. [전열]에서 화자는 매우 여러 번 바뀐다. 현중 노동자를 대표하는 누군가의 목소리(프롤로그, 단협 과정-현재) → 이영현 위원장(단협 평가, 메이데이 집회-현재) → 다시 처음의 화자(128일 투쟁-과거) → 이영현 위원장(구속 동지 석방 환영대회) → 골리앗 투쟁에 참여했던 평조합원 김종철(김종철 인터뷰-현재) → 다시 처음의 화자(결론, 에필로그-현재)의 순이다. 이에 관해서 약간 사소한 기술상의 문제로는 화자가 바뀔 때 명확한 징후가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세 가지 다른 시점을 두 사람의 성우가 번갈아 맡고 있고 그들의 목소리가 확연히 다른 것도 아니므로, 관객은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나’라는 말에 당황하게 된다. 그것이 주구를 지칭하는지, 시점이 언제 바뀌었는지 금방 알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전열]이 취하고 있는 세 사람의 화자 중 어느 누구도 이 영화를 끌고 갈만한 장악력을 부여받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영현 위원장이라는 화자는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고, 보다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해야 할 처음의 화자는 지나치게 격앙되어 있다. 젊은 평조합원 김종철이라는 화자는 현중 노동운동의 과거(골리앗 투쟁)와 현재를 잇고 또 미래를 이끌어갈 인물로 설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나레이션 내용은 처음의 화자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그의 역할은 의도에 미치지 못했다. 김종철의 회상으로 보여지는 골리앗 투쟁은 프롤로그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민자당 출범과 전세값 폭등으로 인한 잇단 자살, 전노협 창립을 설명하는 나레이션과 함께 나오는 단병호 의장의 화면, 이종남 전 법무부 장관이 ‘불법 폭력 분규’에 대한 강력한 대처를 경고하는 화면, 박창수 위원장의 시체 탈취 현장, 그리고 이어지는 골리앗 투쟁은 일반적인 사회 정세로부터 현중으로 돌아오는 프롤로그의 구성을 반복한다. 이는 골리앗 투쟁 당시부터 현재까지의 정세를 읽을 수 있는 화면 구성이지만, 그것이 골리앗 투쟁의 의미를 설명하는 김종철의 인터뷰 화면과 골리앗 투쟁 장면을 담은 화면 사이에 배치되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적절하게 구성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김종철의 말대로 골리앗 투쟁이 당시의 공안 정국을 유일하게 돌파한 노동자들의 투쟁이라는 정세를 보다 상세히 설명해 줄 수 있도록 구성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골리앗 투쟁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보다 잘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속에서 과거의 투쟁을 평가하고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현재의 의미, 그리고 미래의 전망을 부각시키려 했던 다큐멘터리 [전열]의 치명적인 결함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접점이 매우 모호하다는 데 있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 회상되는 과거의 투쟁이 역사적 맥락에서 충분히 설명되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평가 역시 매우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특히 결말부는 사실상 결론을 회피한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시장통에서 술 마시는 세 명의 노동자들의 모습은 나레이션 없이 현장음만으로 포착된다. 그들의 대화는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진단과 어떤 역경 속에서도 살아있는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감의 확인과 새로운 결의에까지 나아가고 있지만 그것은 결론을 대체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이 끌고 온 지난한 과정에 비해 결론은 너무도 일반적인 원칙의 재확인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이 바로 에필로그의 비약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일출 화면과 느리게 잡은 노동자들의 뛰어가는 모습, 여기에 덧붙여지는 “언제 우리가 슬퍼한 적이 있었던가” 운운하는 에필로그는 [전열]이라는 작품 스스로가 우리 노동 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꿰뚫기에는 역부족임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큐멘터리 [전열]은 영화 운동 진영의 다큐멘터리 성원들이 안고 있는 문제 인식과 의욕에 비해 그들의 역량과 경험이 아직 일천함을 보여주었다. 다큐멘터리 작가회의가 [전열] 제작 이후에 해체된 것은 바로 이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성품으로서 [전열]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역사적 의의는 충분히 인정되어야 한다. [전열]이 보여준 치열한 문제 의식과 제작 과정에서 행해진 시도는 매우 선구적인 것이었으며 그것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프리즘에 비친 영상>, 말길, 1992, 남인영 외 서울영상집단 영화평론 모음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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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열 - 리플렛 :: 2004/05/31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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